나비이야기2 - 겨울밤

 

동생이 워크샾을 가는 바람에 어제는 밤에 혼자 있었다. 덕분에 잔소리하는 사람 없이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오랜만에 뜨끈뜨끈하게 잤다. 가스비도 모두 내가 내는데 왜 이런 걸 눈치 봐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 좋더라. 동생 없는 밤이면 여전히 나비가 내 침대 속으로 파고들고. 따뜻한 고양이 옆에 끼고 잤더니 그도 기분 좋고. 뭐 그래서 잠 설치는 건 여전하지만.

그런데 그래서 아침 기온을 제대로 가늠 못해 옷을 얇게 입고 나와버렸다. 스타킹 신은 다리도 시리고, 치마도 얇다. 단지 부츠 안에 파묻힌 발에서만 땀이 난다. 사무실에 와서 오늘 왜 이리 춥냐고 투덜거렸더니 다들 오늘 기온이 영하라잖아. 내일은 영하 7도까지 내려간데 라고 말해준다. 나만 빼고 다들 알고 있다. 생각해보니 나도 주중에 그런 얘기 들어서 너무해 주말에 일정 빡빡한데 날씨 추우면 돌아다닐 때 고생하는데 하며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제의 따뜻한 밤에 모두 잊었던 거다.


사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약속 없는, 술 안 마시고 들어가는 금요일이어서 9시 반까지 야근하고 들어가고도 너무 일찍 간 거 같고, 무언가 어색해서 마트에 들려 간단한 안줏거리를 사서 간 다음 찬장에 재어둔 발렌타인을 땄다. 사실은 동생이 지난번에 면세점에서 사온 와일드 터키에다 콜라를 타 마시고 싶었는데 그 병은 아직 따지도 않았더라. 남의 거 손대기는 마음에 걸리고 해서 그냥 내 몫으로 예전에 부모님 집에서 집어왔던 발렌타인 17년을 땄다. 병을 보니 이것도 면세점에서 사온 거다. 면세점 발렌타인은 가격 저렴하지. 잔을 찾다 나와있는 와인잔을 발견하고 거기에 그냥 술을 따르고 얼음을 몇 개 넣고 사온 콜라가 아까워서 콜라도 살짝. 첫 맛은 좋으나 너무 달다. 술을 살짝 조금 더 붓고.

TV를 켜고 잘 알지 못하는 채널에 내버려둔 채 술잔을 기울인다. 홀짝홀짝. 담배도 한 대. 담배를 물면 나비가 근처에도 안 온다. 담배냄새를 싫어하는 건가. 내 배 위에 올라와 있다가도 담배를 집으면 훌쩍 뛰어 내려가서 사라진다.

레드 와인잔에 반 잔 넘게 만들었던 술을 마시고 나니, 움직이기 너무 귀찮게 노곤해져서 다시 일어나 술을 따를 수가 없다. 덕분에 새 병을 따놓고도 그거 한 잔 마셨다. 그대로 등을 쿠션에 기댄 채 반쯤 누워있으려니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배 위로 올라온다. 좀 더 편안히 자세 잡으며 오랜만에 배와 가슴 위로 고양이를 올려놓고 누웠다. 배 위에서 구릉구릉 울리는 소리가 기분 좋다. 어느덧 5.5kg을 돌파하고 있는 우리 나비. 집에 아무도 없어서 운동도 못 시키고 먹는 거 관리도 못 해줘서 미안하고, 걱정도 되는데. 그래도 사람 있을 때면 잘 뛰어다니고, 놀아 달라고 하고, 놀아 주면 귀찮아하고 그런다. 이번에 고양이 사료와 기타 등등을 7만 원 좀 넘게 주문했는데 사료를 몇 가지 사면서 모두 다이어트 사료로만 주문해버렸다. 그랬더니 처음 사료 바꿔주던 날 잘 안 먹는다. 하나 주면 안 좋아할까 봐 3-4가지 사료를 섞어 줬는데도. 미안하다, 나비야. 하지만, 운동을 못 해서 살이 자꾸 찌니 먹는 거라도 어떻게 조절해야지 않겠니? 그래도 사료 좋은 거란다. 다행히도 하루 이틀 가리더니 이제는 또 주는 대로 잘 먹는다.

배 위에 올려놓은 묵직한 무게는 기분 좋지만 처진 뱃살과 두꺼워지는 목 그래서 만화에 나오는 악당 고양이 같아지는 생김새는 좀 걱정스럽네. 어머니가 나비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

TV를 틀어놓고 이런 고양이 생각을 이것저것 하고 있자니 깜빡 잠들었나 보다. 정말 움직이긴 싫지만 그래도 들어가 자야지. 간신히 일어나서 부스럭대며 주변 정리를 잠깐 하다 귀찮아서 내버려두고, 나비 화장실 청소를 해줬다. 나도 모르게 또 단순노동 삼매경에 빠져서 부스러기까지 모두 주워 치우고 깨끗해진 모래를 보며 뿌듯해 하다 돌아보니 마치 나비가 뭐하느냐며 쳐다보는 눈빛을 하고 있다.

동거인이 없는 밤이니 방문을 열어두고 불을 끈다. 나비가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 우다다 뛰어다니는 소리도 들리고. 동생은 오늘 들어오지 않을 건데 나비는 계속 기다리고 있나 보다.

잠들었다가 매트리스 진동에 깨어 보니 나비가 침대 위로 올라와 있다. 이불을 들쳐주고, 나비는 내 옆구리에 등을 대고 찰싹 달라붙어서 숨을 고른다.

그렇게 또 하룻밤이 지나고, 오늘은 영하의 날씨로 시작하는 겨울이 됐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는 꽤 겨울밤다운 밤이었다. 갑자기 닥쳐온 겨울에 화내던 마음이 사라진다. 그래 난 이미 겨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거다.

by 191970 | 2006/12/02 12:45 | - 그냥하는얘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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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여우비 at 2006/12/03 23:05
와..잔잔하니 좋네요. 놀아달라고 해놓고, 놀아주면 귀찮아한다니 어쩜 그렇게 세상 고양이들은 다 똑같을까요. 다이어트 사료 싫어하는 것도 똑같고;;;

추운 겨울, 감기 걸리지 말고 따뜻하게 보내세요 :)
Commented by 191970 at 2006/12/04 13:00
여우비님 / 감사합니다. :)
그리고 고양이는 다들 그런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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