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5월 08일
나비이야기3
야근을 하다 9시 반쯤 퇴근. 집에 들어가니 10시 반이 조금 안됐다. 씻고 일찍 자고 싶지만, 막상 이렇게 밤에 집에 들어와 바로 자려고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아깝다. 어차피 아침이 되면 부랴부랴 출근해서 일 시작하는 게 전부일 텐데. 씻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너무 귀찮아서 침대에 반쯤 드러누운 채 전날 앞 부분만 들쳐보다만 '어둠의 속도'를 펼친다.

동생이 들어와 있지 않아 방문을 열어두니, 곧 요즘 자주 열어두어 익숙한 나비의 타다닥 타다닥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잠시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더니 침대로 올라온다. 손을 뻗었을 때 닿지는 않지만,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너도 체온을 그리워했구나 느껴지는 그 거리, 내가 고양이 거리라 부르는 그 거리만큼 떨어져 앉아 뒤통수를 보이고 정자세로 앉아 있다. 고양이 모양새다. 작은 머리, 항아리 같이 잘빠진 몸매. 우리 예쁜 나비. 눈을 돌려 읽던 책을 계속 읽는다. 앞 부분에선 집중이 잘 안 되고, 그리 끌리지 않던 데 비해, 뒤로 갈수록 흡입력이 놀랍다. 책을 열심히 읽다 보니 이번에 나비가 내 골반 위로 올라오고 있다. 동생이 누우면 배에서 가슴 위에 걸치며 턱 밑에 머리를 부비는 걸 좋아하면서, 나한테는 내 골반, 아랫배 쪽으로 올라온다. 이번에도 내 아랫배-골반 쪽에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근데, 엉덩이가 내 얼굴 쪽이다. 덕분에 살랑살랑 흔드는 꼬리에 얼굴을 맞는다. 꼬리를 잡아서 책 너머에 끼고 계속 책을 읽는데, 이제는 무게 때문에 배가 아프다. 너무 묵직해서 숨 쉬는 배가 너무 힘든 거다. 뒷다리와 엉덩이 쪽을 잡고 앞으로 밀었다. 좀 내려가라 이놈. 안 움직이려는 나비 덕에 몸 앞쪽은 원래 있던 데 있고 뒷다리만 앞쪽으로 밀려 엉덩이와 뒷다리를 들고 있는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 또 가만히 있는다. 이렇게 웃길 때가. 나비야, 그러고 있으란 뜻이 아니었어. 다시 앉아 하면서 엉덩이를 토닥여 줬다. 그랬더니 자세를 바꿔 이제는 내게 옆얼굴을 보인 채 똬리를 틀고 눕는다. 무게가 평면으로 넓게 분산되어 아까보단 훨씬 편해졌다.

다시 책에 집중하다, 하나의 챕터가 끝나면 나비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너무 예뻐서 뺨을 간질간질 해주었더니 이번엔 허공에 털이 날린다. 자주 빗질을 해주면 좋으련만, 목욕도 빗질도 왜 이리 싫어하는지. 뭐 괜찮다. 나도 동생도 호흡기 질환도 없고, 털에 민감하지도 않으니까. 이제는 내 침대도 털 범벅이다. 엊그제 동생이 새로 꺼낸 검은 봄 재킷은 허리 아래쪽이 하얗게 털투성이였다. 동생을 투덜투덜 대며 열심히 테이프로 털을 띄어 냈고, 나는 털투성이 침대에서 그냥 잔다. 가방 중 하나는 방심하고 침대 옆쪽에 던져두었다 며칠 뒤에 봤더니 털이 너무 많이 묻어서 (가방 위에 앉는 걸 좋아한다.) 들고나갈 수가 없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만 하며 계절이 넘어가도록 쓰지 못하고 있다. 가끔은 사무실에 앉아 입고 있는 티셔츠나 니트에 고양이 털이 묻어 있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때론 스타킹에도 끼어 있다. 놀라울 정도다. 고양이 털이란 건. 하지만, 다 괜찮다. 우리 나비, 이렇게 예쁜데 그깟 털 좀 날리고, 털 좀 묻는 게 무슨 상관일까. 똬리를 틀고 눈을 살포시 감고 긴 숨을 푸르르 내쉬며 자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그 모든 게 다 상관이 없어진다. (하지만, 사실 지난 겨울에 나비가 해먹은 십몇만원어치 스타킹은 정말 가슴이 아프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계단 올라오는 소리와 현관문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나비는 벌떡 일어나 우다다 뛰어나간다. 치사한 놈. 평화는 사라지고, 이제 다시 일상이다. 씻고, 정리하고, 자자. 그럼, 내일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 by | 2007/05/08 20:11 | - 그냥하는얘기 | 트랙백 | 덧글(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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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씻어내자님 / 사실 저희 나비도 저 잘 밟고 지나가요. 어떤 때는 배위에 올라오는 것처럼 와서는 올라오는 동작 그대로 다시 내려가기도. "뭐야 저놈. 지나가는 거야?" 할 때도 있고, 정말 그 위에서 도약할 때도 있고-_- 그렇게 도약하면 숨이 안쉬어져요.
예전엔 돌아서 지나가줬는데 ㅠㅠ 작은애는 제 가슴위에서 자요...